귀거래사 (歸去來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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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 (歸去來辭)

배종철 2 2,111 2019.07.24 17:48
중국 진(晉)나라 시인 도연명이 현령이 된 지 80일 만에 상관급인 독우(督郵)가 온다고 관내가 왁자했다. 마중 나가 상관을 영접해야 한다는 참모들의 말에 도연명은 이렇게 탄식했다.
“쌀 다섯 말의 녹에 팔려 일개 독우에게 허리를 굽힌단 말이냐?”
결국 도연명은 벼슬을 내던지고 귀향하여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은 뒤 평생을 은거했다.

왕의 남자. 합리적 보수주의자. 얼마 전 세상을 떠난 故 정두언 전 의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관료의 길을 걷다가 MB를 만나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역임했고, MB가 대통령이 되면서 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했다. 여기까지는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이상득 전 의원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MB와 갈등을 빚었고, 20대 총선에서 패배한 여파로 우울증까지 앓았다. 이 때 그는 삶의 의미를 잃고 극단적 선택을 했지만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이 우울증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인생에서 가정법이란 통하지 않는다지만 이런 가정을 해 보고 싶다. 그가 4선 문턱에서 낙마한 후 정치와 무관한 길을 걸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아예 정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탤런트 공채에서 최종 면접까지 오른 그의 뜻을 가족이 막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좋아하는 연기를 하면서 신명나게 살아가진 않았을까. 말년에 정치평론가로서 열정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 역시 진정으로 원했던 삶은 아니었던 것 같다. 권력의 짐을 내려 놓은 뒤, 부서진 꿈의 조각들을 맞추며 살아가기엔 그는 너무 지쳐 있었다.

8년 전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김추련 씨도 그랬다. 전성기 때 그는 정윤희, 장미희, 원미경 등 당대 최정상의 여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큰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 그가 김해에 터를 잡았을 때 몇 번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화려했던 옛 시절을 자주 떠올렸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허나 여전히 꿈이 있었고, 목에 두른 머플러가 어울리는 세련되고 중후한 남자였다. 어두운 기운이 살짝 스치곤 했지만 늘 미소를 머금은 표정이었다. 음반을 몇 차례 발표했고, 방송에도 출연하며 옛 영광을 재현할 날을 기다렸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역시 정상에서 멀어진 후 찾아온 우울증이 원인이었다.

정 전 의원은 한 때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수감되기도 했고, 이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는 구치소에서 나온 뒤, “나를 기다린 건 배신이었다. ‘이제 정두언은 끝났구나’ 생각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고 했다. 배신과 위선으로 점철된 정치판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는 역부족이었을까. 하여 그가 떠난 지금, 간신배가 들끓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세상과 별리(別離)한 도연명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귀거래(歸去來)한 고인의 평온한 안식을 빈다.


배종철 대기자 (칼럼니스트)

Comments

중소넷 2020.09.15 09:58
좋은글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이 힘드시죠..어서 종식되어서 만나뵙기도 해야하는데말입니다.
오늘하루도 알차게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송욱 2020.09.17 16:46
좋은글 잘 봤습니다.앞으로도 많은정보 부탁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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